2009-01-11

과속스캔들

스타·돈·폭력, 대작 코드는 없어도 흥행은 대박
600만 관객 향해 달리는 영화 ‘과속스캔들’

영화'과속스캔들'의 흥행성적이 놀랍다. 관객 600만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08년 개봉작 중 흥행 2위다. 충무로가 전혀 예상못한 결과다. 중앙SUNDAY가 이 대박흥행의 특징을 5무(無) 3비(備)로 짚었다.

이 영화, 이렇게 잘될 줄 아무도 몰랐다. 영화 ‘과속스캔들’이 침체기의 충무로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흥행 대박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 12월 초 개봉해 한 달여 만인 현재까지 관객 550만 명을 넘어섰다. 2008년 개봉작 가운데 흥행 2위였던 ‘추격자’(507만 명)를 제치고 흥행 1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688만 명)을 추격하는 놀라운 성적이다.

충무로가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11월 말 시사회 직전까지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제로였다. 아니 마이너스였다. ‘스캔들’ 운운하는 제목도, 말이 안 될 것 같은 줄거리도 ‘안 봐도 뻔한 코미디’라는 선입견을 불렀다. 한때 잘나갔던 아이돌 가수 출신의 30대에게 있는 줄 몰랐던 20대 딸이 나타난다니, 그것도 여섯 살짜리 아들을 둔 미혼모로?

영화가 공개되자 예상은 깨졌다. ‘기대 이상’이라는 호평이 나돌기 시작했다. 줄거리가 지닌 자극성과 달리 완성된 영화에는 유쾌하고 편안한 웃음이 흘렀다. 차태현의 원톱 코미디일 거라는 예상도 기분 좋게 빗나갔다. 혼자 돋보이는 대신 실제 그의 모습을 닮은 느긋한 캐릭터를 넉넉하게 연기했다. 대신 신예 박보영과 아역 왕석현의 캐릭터·연기가 큰 비중으로 부각돼 보기 좋은 삼각균형을 이뤘다.

그래도 흥행은 기껏해야 200만 명 안팎의 ‘중박급’일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투자·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이하 롯데) 역시 ‘잘하면 관객 250만~300만 명’을 전망치로 내놓았다. 이 회사의 전력으로는 대단히 높은 기대치였다. 2004년 한국영화 투자·배급에 뛰어든 이래 롯데의 최고 흥행 성적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이 거둔 210만 명이다. 극장 체인을 끼고 있기 때문에 편의상 3대 메이저로 불려 왔을 뿐 마이너를 벗어나지 못했다. 관객 점유율 1위의 CJ엔터테인먼트, 2위이면서도 ‘괴물’ ‘태극기 휘날리며’ 등 1000만 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터뜨린 쇼박스와 비교할 수 없었다. 제작사 토일렛픽쳐스는 안병기 감독의 공포영화로만 알려진 영화사였다. 더구나 메가폰을 잡은 강형철 감독은 유명 감독의 조감독 출신도 아니라서 그야말로 낯선 신인이었다.

순 제작비도 24억원으로 많은 편이 아니다. 충무로 상업영화 평균인 30억원대를 밑돈다. 주연배우 차태현은 최근 흥행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톱스타로 분류하기 힘들었다.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문제작의 요소도 없었다. 화제가 될 만한 자극적 장면도 없었다.

이처럼 ‘과속스캔들’은 역대 대박 영화의 흥행 코드와 비교하면 5무(톱스타, 큰 제작비, 메이저 영화사, 사회적 이슈, 폭력이나 성 같은 자극적 요소가 없음)의 영화다. “이 정도로 흥행한 영화 중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영화제작자 심재명 대표(MK픽처스·‘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는 지적했다.

관객 5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역대 한국영화 20여 편을 훑으면 대개 2, 3개씩의 흥행 코드가 겹친다. 스타급 배우·감독이 탄탄한 이야기로 결합한 대작 ‘괴물’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영화 최초이자 연달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는 현대사의 비극을 재조명한 대작으로, 사회적 이슈가 꼬리를 물었다. ‘왕의 남자’는 제작비가 대작은 아니었으되, 현실을 빗댄 듯한 풍자와 동성애 코드가 흥행 파워를 더했다.

‘디워’는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컴퓨터그래픽이 일찌감치 화제였다. ‘친구’나 ‘타짜’는 스타 배우, 그리고 수위 높은 폭력 장면이나 성적 묘사가 초반 화제를 모았다. 남북문제를 다룬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웰컴투동막골’과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에도 스타와 큰 제작비가 고루 결합했다. ‘미녀는 괴로워’는 외모지상주의·성형 열풍을, ‘말아톤’은 자폐증·장애우라는 사회적 이슈를 품고 있었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는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실제 연쇄살인 사건이 모티브였다. ‘가문의 영광’ ‘가문의 위기’ ‘투사부일체’ ‘조폭마누라’ 같은 일련의 조폭 코미디는 폭력과 고강도 유머를 결합했다.

같은 코미디 영화라도 ‘과속스캔들’은 이에 비하면 순한 편이다. 초반의 홍보 카피는 ‘웃다 쓰러진다!’로 코미디라는 점을 강조했다. 웃긴 건 맞았다.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폭발력을 발휘한 것은 이 영화에 잠재된 ‘가족’이라는 코드였다.

‘과속스캔들’의 주인공인 30대 남자, 20대 여자는 연인이 아니라 부녀관계다. 연인관계의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영화시장의 주요 관객인 10대 후반~30대 초반용에 그쳤을 것이다. ‘과속스캔들’은 가족용으로 관객 확대가 가능했다. 아버지는 중학교 때, 딸은 고교 때 속칭 ‘과속’으로 2세를 낳았다는 아찔한 설정이면서도, 직접적인 성 묘사는 전혀 등장시키지 않았다. 폭력 장면도 물론 없다. 롯데의 최건용 상무는 “딸이 엄마에게 권할 수 있는 가족물이자 편안한 웃음을 주는 코미디라는 점이 우울한 이 시대에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과속스캔들’이 복고적 가족주의를 역설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이 영화의 가족 3대는 전통적 개념의 가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의 동거에 가깝다”며 “30대 가장은 철이 없는 반면 20대 미혼모는 나이보다 철이 들었고, 여섯 살 꼬마도 의외로 속 깊은 모습을 보여 준다”고 분석했다. 나이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세대 역전의 구성이라는 것이다. ‘가문의 영광’ 시리즈나 ‘두사부일체’ 시리즈 같은 조폭 코미디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강씨는 “조폭 코미디도 가족 코드가 들어 있는데, 가부장적 가족관계나 이와 닮은 조직관계가 중심”이라고 지적했다. 미혼모를 등장시키면서도 이를 사회적 이슈나 논쟁거리로 다루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강씨는 “요즘 같은 시절에 가족은 위로도 되지만 부담도 되는 존재”라며 “이 영화는 미혼모 같은 문제에 대한 현실적 부담감을 제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운 감각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평론가 허문영씨는 “끔찍한 얘기를 깜찍하게 소화했다”고 표현했다. “여고생 때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이후 겪게 되는 현실은 꽤나 끔찍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인물에게선 전혀 그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허씨는 “이야기 전개에서는 중대한 결점인데도, 박보영이 표현하는 깜찍하고 오묘한 매력이 이를 얼버무려 그럼직하게 넘어가도록 한다”고 말했다.

박보영은 앞서 TV드라마 ‘왕과 나’ 등의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스크린 데뷔 첫해에 이 영화를 통해 단박에 충무로 유망주로 떠올랐다. 연기가 난생처음인 6세 아역 배우 왕석현도 예상하지 못한 활약을 보여 줬다. 어린아이의 동작과 대사를 어른들의 그것 못지않게 의뭉스러운 효과로 활용한 연출이 뛰어났다. 심재명 대표는 “‘왕의 남자’의 이준기가 그랬듯,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배우를 발견하게 되면 관객의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낸 다음의 일이다. 사전에 화제가 될 만한 요소가 전무했던 ‘과속스캔들’은 관객을 유인할 흥행 도화선으로 입소문에 집중했다. 개봉 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무려 6만여 명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다. 인지도·기대감 없이 미리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인터넷에 댓글과 리뷰로 호평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홍보 전략의 선배는 2002년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다. 이 영화의 주연은 평생 처음 영화에 출연하는 당시 78세의 김을분 할머니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던 9세 아역 배우 유승호였다. 스타 마케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제작비도 적었다. 대신 영화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을 무기 삼아 4주 동안 3만 명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시사회 관객의 입소문은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대박급 흥행 성적과 별개로 ‘과속스캔들’에는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이 있다. 평론가 강유정씨는 “과도하게 웃기려 하지도, 과도하게 울리려 하지도 않고, 가볍게 시작해 가볍게 끝나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다. 영화 제목에 빗댄 어느 네티즌의 표현을 빌리면 “과속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자칫 신파로 빠질 수도 있는 줄거리인데도, 일관된 속도로 웃음을 유지한다. 웃음에서 눈물로 급차선 변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한때 ‘시작은 웃음, 끝은 눈물’이 한국영화의 흥행 공식으로 통용된 적이 있었다. 과거 한때란, 잦은 반복으로 관객이 싫증 낼 만큼 써먹었단 얘기다. 직접 쓴 시나리오로 이 데뷔작을 연출한 강형철 감독은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내가 식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며 “내가 재미라고 생각한 부분을 관객도 재미있게 봐 준 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의 관객 반응에는 ‘한국 코미디, 이만큼만 만들라’는 식의 주문이 올라오곤 한다. 평론가 허문영씨는 “한국의 워킹타이틀(고품격 코미디 영화로 유명한 영국 제작사)을 꿈꿔 온 충무로 영화사들이 ‘과속스캔들’을 모범 답안으로 꼽기도 하더라”고 전했다. 모범 답안으로 합당한 영화인지는 차차 더 따져 볼 일이다. 지금은 충무로의 불황을 가족 코드와 입소문, 적절한 웃음으로 돌파한 이 영화의 흥행 성적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다.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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